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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의 정원

저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었어요.빠르게 판단했고,사람들은 저를 찾았고,저는 해결했어요. 성과도 있었어요.누가 봐도 잘하고 있었죠. 그렇게 오래 살았어요.현장에서,직장에서,때로는 집에서도저는 늘 ‘믿고 맡기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깨달았어요.문제해결사에게 오는 건,항상… 문제더라고요. 문제는 계속 생겼고,저는 계속 풀었고,풀고 나면또 다른 문제가 찾아왔어요. 그러다 지쳤어요.정말 많이요. 왜 내 인생은 이럴까.왜 늘 일이 터질까.왜 나는 쉬지 못할까. 저는 불평을 하고남 탓도 하고,삶을 원망하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저는 또 문제를 풀었어요.나를 증명하고 싶어서요.무능력해 보이기 싫어서요.그리고,사실은 사랑받고 싶어서요. 돌아보면,저는 성과로 사랑을 구했고,해결로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

휴대폰 대리점에서기기 변경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문이 열리며라디오 소리가 먼저 들어왔어요.큰 노랫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죠.라디오를 틀어놓은 채,할아버지 한 분이 천천히 들어오고 계셨어요. “핸드폰 바꾸려고.” 조금 어눌한 목소리였어요.점장이 큰 소리로 대답했어요.“할아버지는 핸드폰 바꾸실 수 없으세요.” 하지만 할아버지는조금 전과 똑같은 말로 다시 말씀하셨어요. “핸드폰 바꾸려고.” 이번에는 점장이“지난번에 바꾸셨잖아요. 지금은 안 돼요.” 라고 대답했어요. 그 순간,문득 궁금해졌어요. 이 할아버지는 이 대리점에 자주 오시는 분일까요?올 때마다 똑같이 말씀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오늘 정말핸드폰을 바꾸러 오신 걸까요?그런데 할아버지가 실제로 구매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점장이 그냥 돌려보낸 걸까요? 혹..

꿈에서나는 커다란 배 위에 있었어요. 망망대해를 가르는 배.어디서 출발했는지도,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그 배에 머물고 있던 나는 왠지 모르게 설레어했어요. 그 배에서 내리려면시험을 통과해야 했어요.‘여권’을 받아야만다음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는그런 설정이었어요. 나는 한 단어를 계속 외우고 있었어요.익숙하지 않은 철자. 같은, 어딘가 이상한 단어. 꿈속에서, 그건 '과거'를 뜻했어요.하지만 아무리 반복해도그 단어가 외워지지 않았어요. 노트에 줄을 긋고, 다시 쓰고,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외웠지만자꾸만 틀렸어요. 배에서는 파티가 열렸고,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고기를 굽고 있었어요.그 속엔오래전 인연이었던 전 남자친구도 있었어요. 그는 웃으며 말했어요."같이 고기 좀 먹어줄래.?" 나는 예의상 고개를..

국민학교 1학년. 처음 받은 숙제는종합장을 삼등분으로 접고크레파스로 단어를 써오는 거였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덧붙였어요.“크레파스가 번지니까, 뒷면은 쓰지 말아요.” 그게 숙제의 규칙이었어요.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는데엄마가 물었어요.“왜 뒷면은 안 써?” 저는 선생님 말대로 했다고 말했어요.그런데 엄마는, 제가 잘못 들은 거라고 했어요.“종이가 아깝잖아. 뒷면도 써.” 그렇게,뒷면까지 써서 숙제를 해갔어요. 그리고 다음 날,선생님은 제 뺨을 때렸어요. 눈물이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흘러내렸어요.너무 서러웠어요. 마침 비가 오던 날이었고엄마가 우산을 들고 학교로 저를 데리러 왔어요.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어요.엄마도 따라서 눈시울이 붉어졌고저를 앞질러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렀어요. 나는 ..

홍콩야자에 꽃이 피었어요. 처음엔 몰랐어요.잎 사이에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생겨나길래잎이 새로 나려나, 했죠.하지만 아니었어요.벌써 3년째 키우는 아이인데,이런 일은 처음이었거든요. 저는 식물들의 감정을조금은 읽을 수 있어요.이 야자나무는,밖에 있는 걸 유독 좋아했어요.비가 오면 비를 맞히고,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게 했죠.보통은 실내 식물이라는데…얘는 밖에 두는 게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고맙게도,꽃을 피워 주었어요. 세상에.이 나무에서, 그것도현관 계단 한켠,그늘지고 바람 많은 곳에서꽃이 피다니요. 홍콩야자는꽃을 거의 피우지 않아서그 꽃말이 ‘행운’이라고 해요. 그래서 오늘은,이 조용한 기적을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요. 이 아이도 꽃을 피우느라 아마 힘들었을까요? 엘리의 정원에서.계단 위에서 조용히 피..

아빠랑 바지를 사러 갔어요.어버이날이라서요. 아빠는 배가 많이 나왔어요.팔다리는 가늘어졌는데, 배만 동그랗게 튀어나왔어요.당뇨 때문이라고 알고 있지만,아빠는 술을 끊지 못하세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잔소리가 별로 효과가 없다는 걸 알거든요. 바지를 고르는 것도 일이에요.인터넷 쇼핑은 꿈도 못 꿔요.키가 작고 배만 나왔으니직접 입어봐야만 해요. 매장에 갔어요.아빠가 “허리 38이야.”라고 말했어요. 38 사이즈를 펼쳐봤어요.순간 저는 너무 놀라 말했어요.“아빠, 이거 너무 큰데? 36 입어 봐.”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바지를 받아 들고피팅룸으로 들어갔어요. 잠시 뒤, 커튼이 열렸어요.바지는, 너무 작았어요.허리가 터질 것처럼 말이에요. 저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어요.“아빠~ 진짜 살 빼야 하는 거 ..

새벽 네 시에피코가 저를 깨웠어요.나가자고 했어요. 하지만 너무 피곤했어요.잠든 지 얼마 안 됐고,점심엔 가족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거든요.그래서 “하우스~”라고 외치고그냥 다시 잠들었어요. 다섯 시가 됐을 때피코가 또 깨웠어요. 이번엔 짜증을 내면서 일어났어요.피코가 앞발을 팡팡 구르며 너무 좋아했어요.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갔어요.그때까지만 해도그냥 산책이 하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어요.워낙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라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얼마 걷지 않아피코가 묽은 변을 싸고,세 발자국을 걷더니 토를 했어요. 아, 그랬구나…그걸 보자그제야 상황이 이해됐어요. 그때 피코가뒷발을 세차게 차더니스스로 신호를 주는 듯,앞발을 팡팡 두 번 구르고신나게 뛰어나갔어요.시원했는지,살 것 같았는지. 그 모습을 ..

텃밭을 지나던 어느 날,나는 깜짝 놀랐어요.초록색 장갑이 하나,쫄대 위에서 ‘딱’— 서 있었거든요. “헉… 뭐야, 저거… 설마… 허수아비?” 나는 괜히 눈을 가늘게 뜨고, ‘엘리의 정원에 이런 캐릭터도 있으면 재밌겠다!’생각하며 기묘한 스토리를 막 써 내려가고 있었죠. 하지만 그때,아빠가 나타나 한마디. “그거, 그냥 장갑 말리는 거야.” … …뭐라고요? 🤨 “비 맞았잖아. 젖어서 그냥 꽂아놓은 거야.”하시면서 태연하게 지나가시는 아빠. 그 순간모든 판타지와 허수아비의 로망은사정없이 펑— 하고 날아가 버렸어요. 하지만 웃겼어요.정말 너무 웃겼어요.‘아… 나 또 혼자 너무 몰입했구나…’ 싶어서. 그 초록 장갑은허수아비도 아니었고,비밀스러운 정원 수호자도 아니었지만—이상하게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 맴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