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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의 정원

아빠랑 바지를 사러 갔어요.어버이날이라서요. 아빠는 배가 많이 나왔어요.팔다리는 가늘어졌는데, 배만 동그랗게 튀어나왔어요.당뇨 때문이라고 알고 있지만,아빠는 술을 끊지 못하세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잔소리가 별로 효과가 없다는 걸 알거든요. 바지를 고르는 것도 일이에요.인터넷 쇼핑은 꿈도 못 꿔요.키가 작고 배만 나왔으니직접 입어봐야만 해요. 매장에 갔어요.아빠가 “허리 38이야.”라고 말했어요. 38 사이즈를 펼쳐봤어요.순간 저는 너무 놀라 말했어요.“아빠, 이거 너무 큰데? 36 입어 봐.”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바지를 받아 들고피팅룸으로 들어갔어요. 잠시 뒤, 커튼이 열렸어요.바지는, 너무 작았어요.허리가 터질 것처럼 말이에요. 저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어요.“아빠~ 진짜 살 빼야 하는 거 ..

텃밭을 지나던 어느 날,나는 깜짝 놀랐어요.초록색 장갑이 하나,쫄대 위에서 ‘딱’— 서 있었거든요. “헉… 뭐야, 저거… 설마… 허수아비?” 나는 괜히 눈을 가늘게 뜨고, ‘엘리의 정원에 이런 캐릭터도 있으면 재밌겠다!’생각하며 기묘한 스토리를 막 써 내려가고 있었죠. 하지만 그때,아빠가 나타나 한마디. “그거, 그냥 장갑 말리는 거야.” … …뭐라고요? 🤨 “비 맞았잖아. 젖어서 그냥 꽂아놓은 거야.”하시면서 태연하게 지나가시는 아빠. 그 순간모든 판타지와 허수아비의 로망은사정없이 펑— 하고 날아가 버렸어요. 하지만 웃겼어요.정말 너무 웃겼어요.‘아… 나 또 혼자 너무 몰입했구나…’ 싶어서. 그 초록 장갑은허수아비도 아니었고,비밀스러운 정원 수호자도 아니었지만—이상하게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 맴돌았어..

피코가 마킹을 할 때면,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봅니다.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는 걸 보면,괜히 마음이 설레요. 오늘은 문득,중학교 때 미술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여러 준비물을 챙겨야 하는 것도 번거롭고,미술에 소질도 없었던 저는그 시간이 마냥 싫었어요. 특히공원이나 산에 모여 그림을 그리는,그 ‘사생대회’라는 날을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함께 나무와 꽃을 그리라고 하는 그 시간이왠지 강요처럼 느껴졌던 걸까요? 수채화 붓을 꾹꾹 눌러 잎사귀를 표현하라고 했던 선생님의 말도,그때는 그저 지루한 주문 같았어요.그런데, 이제야고개를 들어 나뭇잎을 바라보면,그때 왜 그렇게 그리라고 했는지알 것 같아요. 대학원 재학 때,소중한 것을 디지털 아트로 표현하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요. 교수님이 말씀..

오늘, 피코가 산책 중 어떤 집 앞에 묽은 변을 쌌다.최선을 다해 치웠지만, 아스팔트 틈 사이에 남은 자국은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정말 미안했고, 민망했고, 어쩐지 수치스러웠다. 그런데 문득, 피코는 언제나 자기표현에 거리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마킹이든, 짖음이든, 피코는 자기를 숨기지 않는다. 나는?나를 감추기 위해 늘 노력하며 지냈던 것은 아닐까.보이지 않게 치우고, 없던 일로 만들고,수치심이라는 이름 아래 덮어두고 있었던 것들. 오늘은 피코를 통해‘표현’과 ‘수치’ 사이에 놓인 나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게 되었다. 나도 피코처럼 조금은 더 솔직해져 볼까?

요즘은 일을 쉬고 있어서,시간에 쫓기지 않고아무런 걱정 없이 산책을 할 수 있는 날들이 많아졌다. 사진을 찍고 싶을 때면 꼭 피코가 줄을 잡아끈다.결국 렌즈 너머보다는그냥 눈에 오래 담아두기로 했다. 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바라봤다.바람도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따스하게 쏟아지고,꽃잎들은 미세하게 흔들리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민들레와 목련, 벚꽃까지.바닥과 나무 위, 하늘 아래에서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마주하며 문득,‘이번엔 또 어떤 존재가 나에게 다가올까’기대하는 마음이 피어났다. 그 순간,나는 마치다른 차원에 발을 디딘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환상적’이라고 부르는 걸까. 생각해 보면,나는 그동안 이런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았다. 아마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