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감성일기 (6)
엘리의 정원

국민학교 1학년. 처음 받은 숙제는종합장을 삼등분으로 접고크레파스로 단어를 써오는 거였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덧붙였어요.“크레파스가 번지니까, 뒷면은 쓰지 말아요.” 그게 숙제의 규칙이었어요.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는데엄마가 물었어요.“왜 뒷면은 안 써?” 저는 선생님 말대로 했다고 말했어요.그런데 엄마는, 제가 잘못 들은 거라고 했어요.“종이가 아깝잖아. 뒷면도 써.” 그렇게,뒷면까지 써서 숙제를 해갔어요. 그리고 다음 날,선생님은 제 뺨을 때렸어요. 눈물이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흘러내렸어요.너무 서러웠어요. 마침 비가 오던 날이었고엄마가 우산을 들고 학교로 저를 데리러 왔어요.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어요.엄마도 따라서 눈시울이 붉어졌고저를 앞질러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렀어요. 나는 ..

홍콩야자에 꽃이 피었어요. 처음엔 몰랐어요.잎 사이에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생겨나길래잎이 새로 나려나, 했죠.하지만 아니었어요.벌써 3년째 키우는 아이인데,이런 일은 처음이었거든요. 저는 식물들의 감정을조금은 읽을 수 있어요.이 야자나무는,밖에 있는 걸 유독 좋아했어요.비가 오면 비를 맞히고,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게 했죠.보통은 실내 식물이라는데…얘는 밖에 두는 게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고맙게도,꽃을 피워 주었어요. 세상에.이 나무에서, 그것도현관 계단 한켠,그늘지고 바람 많은 곳에서꽃이 피다니요. 홍콩야자는꽃을 거의 피우지 않아서그 꽃말이 ‘행운’이라고 해요. 그래서 오늘은,이 조용한 기적을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요. 이 아이도 꽃을 피우느라 아마 힘들었을까요? 엘리의 정원에서.계단 위에서 조용히 피..

아빠랑 바지를 사러 갔어요.어버이날이라서요. 아빠는 배가 많이 나왔어요.팔다리는 가늘어졌는데, 배만 동그랗게 튀어나왔어요.당뇨 때문이라고 알고 있지만,아빠는 술을 끊지 못하세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잔소리가 별로 효과가 없다는 걸 알거든요. 바지를 고르는 것도 일이에요.인터넷 쇼핑은 꿈도 못 꿔요.키가 작고 배만 나왔으니직접 입어봐야만 해요. 매장에 갔어요.아빠가 “허리 38이야.”라고 말했어요. 38 사이즈를 펼쳐봤어요.순간 저는 너무 놀라 말했어요.“아빠, 이거 너무 큰데? 36 입어 봐.”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바지를 받아 들고피팅룸으로 들어갔어요. 잠시 뒤, 커튼이 열렸어요.바지는, 너무 작았어요.허리가 터질 것처럼 말이에요. 저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어요.“아빠~ 진짜 살 빼야 하는 거 ..

새벽 네 시에피코가 저를 깨웠어요.나가자고 했어요. 하지만 너무 피곤했어요.잠든 지 얼마 안 됐고,점심엔 가족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거든요.그래서 “하우스~”라고 외치고그냥 다시 잠들었어요. 다섯 시가 됐을 때피코가 또 깨웠어요. 이번엔 짜증을 내면서 일어났어요.피코가 앞발을 팡팡 구르며 너무 좋아했어요.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갔어요.그때까지만 해도그냥 산책이 하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어요.워낙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라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얼마 걷지 않아피코가 묽은 변을 싸고,세 발자국을 걷더니 토를 했어요. 아, 그랬구나…그걸 보자그제야 상황이 이해됐어요. 그때 피코가뒷발을 세차게 차더니스스로 신호를 주는 듯,앞발을 팡팡 두 번 구르고신나게 뛰어나갔어요.시원했는지,살 것 같았는지. 그 모습을 ..

게임을 하다 보면,하늘을 날다가 ‘툭’ 튕겨 나오는 구역이 있어요.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허락되지 않은 경계. 그동안 나는자꾸만 그쪽으로 가려했던 것 같아요. 익숙했던 일로,이전의 자리로,한때 능숙했던 역할로요.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그건 비활성화된 구역이었어요. 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저는 계속 그쪽으로 가려했어요.튕겨 나오고,다시 가고,또 한 번 더 가고… 그게 내 길이라고,거기에 내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놓지 못했어요. 사실,예전 스테이지로 돌아가려면방법은 있었던 것 같아요.그 길이 아예 없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저는거기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어요.돌아가도,다시 시작되진 않더라고요. 그 문은,조용히 닫혀 있었어요.그런데 요즘,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게임에도설정된 진행 방향이 ..

오늘은 아빠와 함께 시장에 다녀왔어요.장을 보러 간다기보다는, 그냥 아빠를 따라 걷는 기분으로요. 아빠는 아이쇼핑을 좋아하세요.싸고 좋은 걸 찾아 발길을 멈추고,이 가게 저 가게를 훑으며, 마치 그 사이를 유영하듯 걸어요. 그날도 마찬가지였어요.아빠는 “가자”는 말과 함께인근에서 소주값이 가장 싼 마트로 나를 이끄셨어요. 사실, 소주는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아빠의 친구 같은 존재예요.아빠는 소주 중에서도 독한 소주를 큰 병으로, 하루에 한 병씩 꼭 드세요.술이 없는 자리는 재미가 없다고 아예 피하세요. 오늘도 마트 앞에 나란히 섰는데,나는 괜히 마음이 복잡해졌어요. 아빠는 늘 마트에서 2,360원짜리 소주를 5~6병씩 사요.오래된 습관처럼, 익숙한 리듬으로 배낭을 메고 조용히 시장 골목을 걸으세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