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의 정원
과거 시험 중입니다. 본문
꿈에서
나는 커다란 배 위에 있었어요.
망망대해를 가르는 배.
어디서 출발했는지도,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 배에 머물고 있던 나는
왠지 모르게 설레어했어요.
그 배에서 내리려면
시험을 통과해야 했어요.
‘여권’을 받아야만
다음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는
그런 설정이었어요.
나는 한 단어를 계속 외우고 있었어요.
익숙하지 않은 철자.
<pastshers> 같은, 어딘가 이상한 단어.
꿈속에서, 그건 '과거'를 뜻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반복해도
그 단어가 외워지지 않았어요.
노트에 줄을 긋고, 다시 쓰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외웠지만
자꾸만 틀렸어요.
배에서는 파티가 열렸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고기를 굽고 있었어요.
그 속엔
오래전 인연이었던
전 남자친구도 있었어요.
그는 웃으며 말했어요.
"같이 고기 좀 먹어줄래.?"
나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깼어요.
깨는 순간까지도
그 단어를 열심히 외우고 있었어요.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지금의 나는
인생이라는 한 구간의 배 위에 올라서 있고,
그 배에서 내리기 위해선,
‘과거’라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 아닐까?
아직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
설명할 수 없는 내 마음의 소리들,
끝내 마주하지 못한 감정들.
그것들은 모두
내가 풀어야 할 시험이고,
그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다음 세계로 향하는
여권이 건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단어를 그렇게 열심히 외우고 있었던 걸 보면,
나는 아직도
그 배 위에 있는 것 같아요.
다만,
이제는 알아요.
과거를 이해하고 나서야
그 배에서 내릴 수 있다는 걸요.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저의 열망이
얼마나 큰 지도요.
엘리의 정원에서.
기억이라는 시험지를 품에 안고,
다음 챕터를 기다리는 항해 중의 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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