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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의 정원

텃밭을 지나던 어느 날,나는 깜짝 놀랐어요.초록색 장갑이 하나,쫄대 위에서 ‘딱’— 서 있었거든요. “헉… 뭐야, 저거… 설마… 허수아비?” 나는 괜히 눈을 가늘게 뜨고, ‘엘리의 정원에 이런 캐릭터도 있으면 재밌겠다!’생각하며 기묘한 스토리를 막 써 내려가고 있었죠. 하지만 그때,아빠가 나타나 한마디. “그거, 그냥 장갑 말리는 거야.” … …뭐라고요? 🤨 “비 맞았잖아. 젖어서 그냥 꽂아놓은 거야.”하시면서 태연하게 지나가시는 아빠. 그 순간모든 판타지와 허수아비의 로망은사정없이 펑— 하고 날아가 버렸어요. 하지만 웃겼어요.정말 너무 웃겼어요.‘아… 나 또 혼자 너무 몰입했구나…’ 싶어서. 그 초록 장갑은허수아비도 아니었고,비밀스러운 정원 수호자도 아니었지만—이상하게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 맴돌았어..

피코가 마킹을 할 때면,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봅니다.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는 걸 보면,괜히 마음이 설레요. 오늘은 문득,중학교 때 미술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여러 준비물을 챙겨야 하는 것도 번거롭고,미술에 소질도 없었던 저는그 시간이 마냥 싫었어요. 특히공원이나 산에 모여 그림을 그리는,그 ‘사생대회’라는 날을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함께 나무와 꽃을 그리라고 하는 그 시간이왠지 강요처럼 느껴졌던 걸까요? 수채화 붓을 꾹꾹 눌러 잎사귀를 표현하라고 했던 선생님의 말도,그때는 그저 지루한 주문 같았어요.그런데, 이제야고개를 들어 나뭇잎을 바라보면,그때 왜 그렇게 그리라고 했는지알 것 같아요. 대학원 재학 때,소중한 것을 디지털 아트로 표현하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요. 교수님이 말씀..

게임을 하다 보면,하늘을 날다가 ‘툭’ 튕겨 나오는 구역이 있어요.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허락되지 않은 경계. 그동안 나는자꾸만 그쪽으로 가려했던 것 같아요. 익숙했던 일로,이전의 자리로,한때 능숙했던 역할로요.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그건 비활성화된 구역이었어요. 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저는 계속 그쪽으로 가려했어요.튕겨 나오고,다시 가고,또 한 번 더 가고… 그게 내 길이라고,거기에 내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놓지 못했어요. 사실,예전 스테이지로 돌아가려면방법은 있었던 것 같아요.그 길이 아예 없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저는거기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어요.돌아가도,다시 시작되진 않더라고요. 그 문은,조용히 닫혀 있었어요.그런데 요즘,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게임에도설정된 진행 방향이 ..

얼마 전, 쿠팡 물류센터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어요.주변에서는 겁을 주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엄청 힘들다”, “지옥이다”… 그런 말들이요.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다녀왔어요. 예전에 유통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어서쿠팡 물류센터는 어떻게 운영될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찝찝해 보이는 작업화를 신었고,제 사이즈는 없어서 헐렁한 신발을 신고 하루를 보냈어요.조끼도 낡고 더러워 보였지만, 그냥 입었어요. 처음에는 소분 업무를 맡는 줄 알았는데갑자기 무전이 오더니, 다른 구역으로 인원을 지원해 달라고 했어요.그래서 저는 다른 곳으로 보내졌어요. 그곳에서는 화물차가 도착하면RT(롤테이너, 바퀴 달린 구르마)를 끌고 화물차에서 내리기도 하고,소분된 상품이 실린 RT를 다시 실어 보내는 작업을 했어요...

이곳은 제가 다시 자신을 만나고, 삶의 진짜 장면을 살아가기 위해 만든 내면의 정원이자, 당신과 함께 숨을 고르며 걸어갈 수 있는 공간이에요.그 여정의 시작을, 이 글로 대신할게요.십여 년간, 사람과 예술, 공동체를 잇는 기획자의 삶을 살아왔어요.공공기관과 문화재단에서 축제, 전시,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하며저는 늘 ‘무대 뒤에서 서사를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타인의 감정과 흐름을 조율하고,삶의 장면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일을 했지만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나의 장면을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그 질문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깊이 제 안에 남았고그로부터 또 다른 여정이 시작되었어요.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솔직한 내면을 기록하고,그 안에 숨어 있던 감정의 진실과 회복의 씨..

오늘은 피코의 미용 날이었어요.횡단보도를 건너는데,두 할머니께서 우리 앞을 천천히 지나가셨어요. 그중 한 분의카키색 재킷에 쓰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어요. Ticket to Anywhere꽃 자수가 곁들여져 있었고,그 문장을 보는 순간,마음속에 조용히 바람이 지나가는 듯했어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문장 하나가왜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졌을까요. 그 순간, 마음속으로 묻고 있었어요.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을까?” 혹시 여러분은,어디든 갈 수 있는 티켓이 있다면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오늘은 아빠와 함께 시장에 다녀왔어요.장을 보러 간다기보다는, 그냥 아빠를 따라 걷는 기분으로요. 아빠는 아이쇼핑을 좋아하세요.싸고 좋은 걸 찾아 발길을 멈추고,이 가게 저 가게를 훑으며, 마치 그 사이를 유영하듯 걸어요. 그날도 마찬가지였어요.아빠는 “가자”는 말과 함께인근에서 소주값이 가장 싼 마트로 나를 이끄셨어요. 사실, 소주는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아빠의 친구 같은 존재예요.아빠는 소주 중에서도 독한 소주를 큰 병으로, 하루에 한 병씩 꼭 드세요.술이 없는 자리는 재미가 없다고 아예 피하세요. 오늘도 마트 앞에 나란히 섰는데,나는 괜히 마음이 복잡해졌어요. 아빠는 늘 마트에서 2,360원짜리 소주를 5~6병씩 사요.오래된 습관처럼, 익숙한 리듬으로 배낭을 메고 조용히 시장 골목을 걸으세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