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의 정원
신용회복위원회에 갔다 본문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빚이 너무 많아져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와중에 일을 힘들게 해서 돈을 얼른 벌어야지라는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성공하고야 말겠다고 커피, 에너지음료를 달고 살면서 잠을 줄이면서 일하고 공부했었던 나인데, 목표가 사라져 버린 나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었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한 것도 아니었다. 분명한 건 예전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이었다.
어느 날 밤 책상에 차분히 앉아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검색을 해댔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 I am dept free>라는 강의를 만나게 되었다. 그 강의의 핵심 내용은 주권자가 되라는 것이었는데, 부채의 무게감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라는 내용이었다. 정부의 제도를 우선 이용하라고 강의에서 강조하고 있었다.( 이 강의는 나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는데 따로 자세하게 써 볼 예정이다. 나도 다시 그때의 감동을 느끼고 싶으므로)
다시 검색에 들어갔다. 신용회복위원회의 제도가 나에게 걸맞겠다 싶어서 커뮤니티 카페에도 가입을 했다. 가입해서 글들을 읽어보니, 나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정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부채의 무게에 짓눌려 살고 있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부채를 지게 된 것일까? 갑자기 먹먹해졌다. 위로도 되었다. 나만 심각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 비슷한 것이었다. 사연들을 살펴보니 가족들이 알게 되면 안 된다라는 내용이 참 많았다. 나에게 가장 힘든 일을 가장 가까운 남편이, 아내가, 부모님이 몰라야 하는 이 상황. 너무 외롭지 않은가. 나 역시 이 사실을 아빠가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상담예약을 우선 해두고 새벽 2시쯤 잠이 들었다.
다음 날부터 미친듯이 검색을 해댔다. 나는 사전채무조정 제도 신청을 할 예정이었는데, 카페에서 열심히 검색을 해댔다. 보니 틀린 정보들도 꽤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제도가 요구하는 기준에 내 신용점수가 높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람.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했던 내 신용점수가 너무 높아서 또 전전긍긍이라니.
대학교 다닐때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다녔었다. 그때부터 내 부채인생이 시작이 돼서 벌써 20여 년이 되었다. 그때는 핸드폰 알림 서비스가 지금처럼 잘 되어 있지도 않았고 신용점수에 대한 개념 자체가 나에게 별로 없었다. 통장에 이자를 채워뒀다고 생각했는데, 3원 정도가 한참 동안 미납되어 있었나 보다. (기억이 가물가물이다.) 은행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빨리 납부하라는 독촉 전화였다. 확인해 보니 신용점수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게 뭔지 몰랐던 나는 그저 너무 무서웠다. 독촉전화도 너무 무서웠고, 일단 내 점수가 바닥인 게 싫었다. 그게 나에게 어떤 불이익을 주는지 그런 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바닥인 게 너무 싫었다. 그때부터 미납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서 악착같이 빚을 갚았다. 힘들어도 열심히 일했고, 또 빚을 내서 대학원도 다니고 나에게 재투자를 했다. 나는 주유소 바람풍선을 볼 때마다 나 같다고 생각한다. 부풀어 올라서 마구 춤을 춰대지만 그저 바람풍선.
신용회복위원회 방문일이 되었다. 이번에 신청은 못하겠지만 어떻게 하면 신청할 수 있는지 물어보기로 다짐하고 차분하기로 했다. 그런데 상담원과 대면을 하자마자 내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그리고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분명하게, 빈틈없이 상담을 해주었는데, 나는 신청 자격이 되는데 오늘 신청을 하겠냐고 물어서 그러겠노라고 했고 15분 만에 그 모든 것이 끝났다. 나오는데 웃음이 나왔다. 꿈을 꾼 것 같았다. 3원 미납에 떨던 대학생 시절이 생각났다. 몇천만 원 빚을 져도 사실 살길이 다 있었다니, 내 공포심은 필요이상으로 부풀어 있었다. 바람풍선처럼.
상담원은 내일부터 신용카드 사용이 안될거라고 했다. 사고사 계좌는 지급정지도 될 거라고 했다. 집에 가는 길에 생필품을 사서 들어왔다. 2개월 동안 심사가 이어지고, 6개월 동안 이자만 내는 기간, 그 이후부터 10년간 원금을 갚는 제도이다. 나에게 8개월 정도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지. 무거운 에너지가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대며 두려워하던 그 에너지 안에는 정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상담원에게 부끄럽기도, 거절당할까 두렵기도, 외로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신청서 작성을 마치고 신용회복위원회 문 밖을 나가는 데, 마음이 사르르 풀려나갔다. 새로이 시작하려고 비워내는 과정을 거쳤음을 깨달았다. 지난 40년간의 교훈을 발판 삼아 다시 시작.
마트에서 장을 보고, 편의점에서 티머니 카드를 사고, 한 번도 거래하지 않았던 은행에 가서 신규계좌를 개설하고 체크카드를 만들었다. 은행에서는 대포 통장을 만들려 온 것은 아닌지 나를 2초 정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더니 신용카드를 만들겠냐고 물어봐서 아니라고 했다. 스타벅스 카드에 돈이 조금 남아있길래 커피나 한잔 하며 마음을 좀 달랠까 했지만 자리가 한 자리도 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강아지에게 뽀뽀하면서 이야기했다.
"돈을 안모아도 좋아. 우리가 자유롭기만 하면 돼. 가볍고 자유롭게 살자. 빨리 갚아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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